폰테크 사이트 [책과 삶]충북 시골서 8·15 맞은 역사학자의 ‘해방 일기’
2026-08-1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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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테크 사이트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은 일기를 썼다. 1993년 초판이 발행된 <역사 앞에서>는 1945년 11월 말부터 1951년 4월까지 그가 남긴 기록을 엮은 책이다. 일기의 시제는 필연적으로 현재진행형이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초기까지가 이 책에서만큼은 역사책의 한 뭉텅이가 아니라, 희비가 교차하는 매일의 경험으로 적혀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에 침음하며 써 내려간 중도 지식인의 글은 기록문학이자 사료로서 가치를 높게 평가받았다.
그 일기가 한 권 더 발견됐다. 역사학자인 아들 김기협은 책머리에서 “(전쟁 중에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던) 다른 공책이 2년 전에 나타났다. 1945년 8월16일자부터 11월29일자 중간까지 담긴 것이다. 형 김기목이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찾아냈다”고 설명한다. 기존 출간본보다 앞선 시점에 쓰인 것일뿐더러 해방 직후의 심경이 담긴 공책이 등장한 것이다.
새로 ‘상’권으로 묶여 발간되는 책은 광복 바로 다음날의 일기로 시작한다. “거리에 모든 사람이 싱글벙글하고 전엔 별로 인사도 없던 사람들까지 기쁜 인사를 함에는 당황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 밤에는 자리에 들어도 한동안 잠들지 않았다. 내 마음 흥분했음일까.”
일기에는 정치·사회적 상황이 급변하던 해방 직후의 사회상이 녹아 있다. 함께 수록된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해제는 김성칠의 글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맥락을 짚는다.
정 교수는 “한국전쟁기 김성칠 일기가 서울대 사학과 교수라는 학문적 지위, 불편부당한 중립적 입장, 서울 정릉동에서 가족 구성원을 이끄는 가장이라는 지위에서 비롯된 전쟁체험담이자 당대에 대한 시대비평이었다고 한다면, 해방 직후의 김성칠 일기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이라는 면 단위 지방사회에서 벌어진 생생한 해방 직후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정치는 생수 한 병만큼의 효용도 주지 못한다”고, 한 소설가가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표현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효용은커녕 참을 수 없는 분노 유발의 수준으로 정치가 나빠졌다. 장동혁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리의 민주투사 행세를 하는 것을 보라. ‘아이큐’나 ‘배신’ 같은 용어를 주고받은 김민석·정청래·송영길의 저열함에, 최민희 등 최고위원 후보들이 보여준 몰상식을 보라. 정치를 망치는 이들을 정치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역설이 괴롭다.
많은 평론가가 양당 내부의 갈등을 ‘감정 대립’ 정도로 보는 듯하다. 안이해 보인다. 미래를 두고 경쟁해야지 왜 과거에 집착하냐고 야단도 친다. 식상하다. “주권자 뜻에 따른 개헌론”을 말한 국회의장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오해를 풀라”고 권면하는 것은 더 비현실적이다. 22대 국회의 의장 자리는 팬덤 추종자이자 대통령 ‘정무특보’의 몫이다. 대통령 팬덤이 그러라고 하지 않는 한, 의장은 개헌을 포기할 수 없다.
22대 국회에서 권력 분립은 실천되지 않을 것이다. 몽테스키외가 경고했듯 견제와 균형이 없는 권력은 ‘전제(despotism)’를 낳는다. ‘윤어게인’을 추종하는 국민의힘 지도부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국민의 성공’이 아니라 ‘이재명의 성공’을 주문처럼 외는 민주당 의원들의 추종도 기이하기는 매한가지다. 필자가 볼 때, 양당은 전체주의의 신세계로 들어섰다. 양당은 몰락할 때까지 지금 같을 것이다.
양당은 자신들보다 더 민주적인 정당은 없다고 자신한다. 국민의힘은 “100% 당원 정당”을 먼저 실현했다. 민주당은 150만 권리당원의 “1인1표주의”를 표방하며 앞서가려 한다. 양당이 당원 주권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치자. 그래도 정의는 정확해야 한다. 그것은 ‘다원적 민주주의’와는 종류가 다른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다. 민주주의 이전에 권위주의는 있어도 전체주의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자라나는 병리 현상이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대중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전체주의자도 대중을 사랑한다. 대중은 강한 힘에 이끌린다는 것이 전체주의의 신념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은 권력 투쟁을 사랑하고, 권력을 향한 길에 대중을 앞장세우길 좋아한다.
권위주의는 다르다. 박정희 정권에서 보았듯, 권위주의는 가난과 저발전을 넘어서려는 ‘후발의 열정’에 의존한다. ‘추격 발전’을 완수하기 위해 시민권을 유보하자는 게 권위주의다. 권위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싫어한다. 그들은 대중 동원을 ‘소요사태’로 간주하고 정당 정치를 ‘부패·비효율’과 동일시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강조하듯, ‘반정치’와 ‘탈동원’은 권위주의의 유형론적 특징이다. 전체주의는 그와 다르다. 전체주의는 인민을 동원한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대중의 동원과 팬덤의 정치화야말로 전체주의자들이 선망하는 최고 경지의 지배다. 이게 핵심이다.
권위주의자와는 달리 전체주의자는 단순한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인민 주권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공유하는 가치다. 다만 민주주의자는 인민을 서로 다른 열정과 이해관계를 갖는 ‘다원화된 주체’로 본다. 복수의 인민 집단 사이에서 전개되어야 할 자유로운 토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생명 원리임을 존중한다. 정치의 실력이란 이견과의 협의, 반대와의 타협을 통해 발휘된다는 사실 또한 잘 이해하는 쪽이 민주주의자다.
전체주의자도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민의 뜻을 존중한다. 다만 민주주의자에게 인민이 ‘복수의 연합체’로 이해되는 반면, 전체주의자에게 인민은 하나의 의지를 가진 ‘일원적 전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의 총회는 ‘하나의 옮음’만 존재해야 하는 ‘이단 척결 대회’와 유사하다. 민주주의자는 토론에서 상대에게 거부감을 덜 주는 언어를 사용한다. 전체주의적 심성을 가진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경쟁 상대를 이적시하려는 욕구를 참지 못한다.
상대를 최고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배신자,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이방인, 지능이 낮은 우생학적 무능력자로 몰아세우는 건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심성에서 발원하는 습성이다. ‘배신의 아이콘’ ‘붕어 아이큐’란 신묘한 표현까지 고안해내는 전체주의자들의 정치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그 일기가 한 권 더 발견됐다. 역사학자인 아들 김기협은 책머리에서 “(전쟁 중에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던) 다른 공책이 2년 전에 나타났다. 1945년 8월16일자부터 11월29일자 중간까지 담긴 것이다. 형 김기목이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찾아냈다”고 설명한다. 기존 출간본보다 앞선 시점에 쓰인 것일뿐더러 해방 직후의 심경이 담긴 공책이 등장한 것이다.
새로 ‘상’권으로 묶여 발간되는 책은 광복 바로 다음날의 일기로 시작한다. “거리에 모든 사람이 싱글벙글하고 전엔 별로 인사도 없던 사람들까지 기쁜 인사를 함에는 당황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 밤에는 자리에 들어도 한동안 잠들지 않았다. 내 마음 흥분했음일까.”
일기에는 정치·사회적 상황이 급변하던 해방 직후의 사회상이 녹아 있다. 함께 수록된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해제는 김성칠의 글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맥락을 짚는다.
정 교수는 “한국전쟁기 김성칠 일기가 서울대 사학과 교수라는 학문적 지위, 불편부당한 중립적 입장, 서울 정릉동에서 가족 구성원을 이끄는 가장이라는 지위에서 비롯된 전쟁체험담이자 당대에 대한 시대비평이었다고 한다면, 해방 직후의 김성칠 일기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이라는 면 단위 지방사회에서 벌어진 생생한 해방 직후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정치는 생수 한 병만큼의 효용도 주지 못한다”고, 한 소설가가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표현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효용은커녕 참을 수 없는 분노 유발의 수준으로 정치가 나빠졌다. 장동혁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리의 민주투사 행세를 하는 것을 보라. ‘아이큐’나 ‘배신’ 같은 용어를 주고받은 김민석·정청래·송영길의 저열함에, 최민희 등 최고위원 후보들이 보여준 몰상식을 보라. 정치를 망치는 이들을 정치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역설이 괴롭다.
많은 평론가가 양당 내부의 갈등을 ‘감정 대립’ 정도로 보는 듯하다. 안이해 보인다. 미래를 두고 경쟁해야지 왜 과거에 집착하냐고 야단도 친다. 식상하다. “주권자 뜻에 따른 개헌론”을 말한 국회의장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오해를 풀라”고 권면하는 것은 더 비현실적이다. 22대 국회의 의장 자리는 팬덤 추종자이자 대통령 ‘정무특보’의 몫이다. 대통령 팬덤이 그러라고 하지 않는 한, 의장은 개헌을 포기할 수 없다.
22대 국회에서 권력 분립은 실천되지 않을 것이다. 몽테스키외가 경고했듯 견제와 균형이 없는 권력은 ‘전제(despotism)’를 낳는다. ‘윤어게인’을 추종하는 국민의힘 지도부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국민의 성공’이 아니라 ‘이재명의 성공’을 주문처럼 외는 민주당 의원들의 추종도 기이하기는 매한가지다. 필자가 볼 때, 양당은 전체주의의 신세계로 들어섰다. 양당은 몰락할 때까지 지금 같을 것이다.
양당은 자신들보다 더 민주적인 정당은 없다고 자신한다. 국민의힘은 “100% 당원 정당”을 먼저 실현했다. 민주당은 150만 권리당원의 “1인1표주의”를 표방하며 앞서가려 한다. 양당이 당원 주권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치자. 그래도 정의는 정확해야 한다. 그것은 ‘다원적 민주주의’와는 종류가 다른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다. 민주주의 이전에 권위주의는 있어도 전체주의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자라나는 병리 현상이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대중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전체주의자도 대중을 사랑한다. 대중은 강한 힘에 이끌린다는 것이 전체주의의 신념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은 권력 투쟁을 사랑하고, 권력을 향한 길에 대중을 앞장세우길 좋아한다.
권위주의는 다르다. 박정희 정권에서 보았듯, 권위주의는 가난과 저발전을 넘어서려는 ‘후발의 열정’에 의존한다. ‘추격 발전’을 완수하기 위해 시민권을 유보하자는 게 권위주의다. 권위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싫어한다. 그들은 대중 동원을 ‘소요사태’로 간주하고 정당 정치를 ‘부패·비효율’과 동일시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강조하듯, ‘반정치’와 ‘탈동원’은 권위주의의 유형론적 특징이다. 전체주의는 그와 다르다. 전체주의는 인민을 동원한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대중의 동원과 팬덤의 정치화야말로 전체주의자들이 선망하는 최고 경지의 지배다. 이게 핵심이다.
권위주의자와는 달리 전체주의자는 단순한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인민 주권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공유하는 가치다. 다만 민주주의자는 인민을 서로 다른 열정과 이해관계를 갖는 ‘다원화된 주체’로 본다. 복수의 인민 집단 사이에서 전개되어야 할 자유로운 토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생명 원리임을 존중한다. 정치의 실력이란 이견과의 협의, 반대와의 타협을 통해 발휘된다는 사실 또한 잘 이해하는 쪽이 민주주의자다.
전체주의자도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민의 뜻을 존중한다. 다만 민주주의자에게 인민이 ‘복수의 연합체’로 이해되는 반면, 전체주의자에게 인민은 하나의 의지를 가진 ‘일원적 전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의 총회는 ‘하나의 옮음’만 존재해야 하는 ‘이단 척결 대회’와 유사하다. 민주주의자는 토론에서 상대에게 거부감을 덜 주는 언어를 사용한다. 전체주의적 심성을 가진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경쟁 상대를 이적시하려는 욕구를 참지 못한다.
상대를 최고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배신자,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이방인, 지능이 낮은 우생학적 무능력자로 몰아세우는 건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심성에서 발원하는 습성이다. ‘배신의 아이콘’ ‘붕어 아이큐’란 신묘한 표현까지 고안해내는 전체주의자들의 정치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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