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형사변호사 [장지연의 역사 상상력]제사·음사 또는 굿판…어떤 기준으로 되살려 무엇을 기원할 것인가
2026-08-1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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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형사변호사 ‘유교 국시’ 조선도 재해 때 여론 들끓을까 우려 굿 폐지에 소극적태종 때 예조서 ‘사직단’ 건의…규정 못 만들어 고을마다 제각각일제강점기 제례 폐지되고 부지는 민간에…최근 복원 움직임왕정도 농경사회도 아닌 지금, ‘존재의 이유’ 판단이 먼저
심각한 자연재해는 무엇 때문일까? 음양오행의 논리에 따라 인간과 자연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전근대 시기에는 기후의 변괴나 괴이한 자연 현상은 인간, 특히 통치자 때문에 벌어진다고 여기곤 했다. 그래서 재해가 발생하면, 통치자는 하늘, 별, 산천 등 온갖 제사처에서 마음을 다해 기원하곤 했다. 즉위한 지 1개월 남짓 된 태종은 경연에서 이에 의문을 표시했다. 이런 제사 중에는 음사, 즉 바르지 못한 제사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런 것들은 없애야 하지 않을까?
조선 초 여러 음사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산천에서 벌어지는 굿판이었다. 영험하다고 소문난 산천의 신사를 찾아 무당을 동원해 노래하고 춤추며 벌이는 굿판은 왕실부터 일반 서민까지 모두가 행했다. 연말연시 같은 때에는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행렬이 길을 메웠고, 병자나 가뭄·홍수 같은 재해가 있을 때는 더욱 간절한 기도 행렬이 이어지곤 했다. 유교를 국시로 세운 조선 정부가 볼 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무당을 동원한 굿판 자체가 나라의 이념적 지향에 맞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경전에서 제후만이 지낼 수 있다고 한 산천의 제사를 서민들까지 지내는 참람함도 문제였다. 남녀가 굿판에 섞여 지내는 바람에 풍기가 문란해지는 것도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폐지하기는 어려웠다. 강압적으로 금지했다가 무슨 재해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백성들이 이게 다 음사 금지 때문이라고 탓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굿판이 진정 영검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힘이 실리지 못한 것도 있었다. 정종은 경연 자리에서 감악산신이 몸에 내려 펄떡펄떡 뛰던 기생을 본 경험을 얘기하며 귀신의 도를 허탄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경연을 주관한 하윤은 이러한 임금의 주장을 딱히 비판하지 않았다.(<정종실록>, 정종 2년 1월10일) 사실 관리들도 굿판에서 무당들과 신명 나게 춤을 추던 시대였다.
이런 시절, 경연에 참여한 응교 김첨은 태종의 질문에 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옛 제도에 따라 이사(里社)의 법을 세워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제사하게 하면 백성이 모두 기쁘게 따르고 음사도 근절될 것입니다.”(<정종실록> 권6, 태종 즉위년 12월18일) 지방마다 사직단을 세워 백성들이 음사 대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제사 지내는 장소로, ‘종묘사직’으로 병칭되며 왕조 자체를 상징하고 수도를 구성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 유교적 제단이다. 위로는 천자부터 아래로는 벼슬 없는 이들도 둘 수 있다고 경전에 나온 단이기도 하다.
김첨의 아이디어는 몇년 후 현실화한다. 1406년(태종 6) 한양 재천도가 행해진 직후, 예조에서는 지방마다 사직단을 설치하자고 건의한다. 전국의 사찰과 신사(神祠)를 혁파하고 그 재산을 향교 등으로 옮기는 동시에 사직단 설치까지 이어진 이때의 개혁은 조선에서 이념의 전환을 이뤄낸 방식을 보여준다.
음사가 폐지된 세상에서 향교의 학생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을 보좌하여 사직단과 문묘에서 제례를 올리게 된다. 중앙과 지방에서 같은 날 일제히 펼쳐지는 이들 유교식 제례는 새로운 이념을 체화한 이들에 의해 행해지며 국가의 이념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단, 이상이 현실에서 그렇게 매끄럽게 구현될 리 없다는 점만 뺀다면.
통일되지 않은 지방의 사직단
“지방의 모든 읍치(행정 중심지)에 사직단을 설치한다.” 굉장히 분명하지만, 실제로 구현을 하려면 세부적인 지침이 필요하다. 어디에 설치해야 하는가? 어떠한 모양과 크기로 설치해야 하는가? 단에서 제례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기와 위패 등은 어디에서 만드는가? 단과 물품에 대한 평상시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전에 할 법한 질문들은 물론, 실제 구현 과정에서 새롭게 생긴 질문들도 빠르게 해결이 되어야 하나의 제도가 안착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권위 있는 문서에 기록됨으로써 ‘불변의 지침’이라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
의례 분야에서 이러한 권위를 지닌 책이 바로 성종 대 완성된 <국조오례의>와 <국조오례서례>다. 이 책들에는 중앙의 여러 단에 대한 정연한 규정이 적혀 있다. 그런데 정작 지방 사직단의 위치나 제도에 대해서는 “주현의 사직단은 성 서쪽에 있다. 사와 직은 하나의 단을 공유하며 석주가 없다”는 아주 범범한 규정만 나와 있다.(<국조오례서례> 단묘도설) 성 서쪽이라니 범위가 너무 넓다. 더구나 성이 없는 읍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와 직이 한 단을 공유한다 하니, 사단과 직단을 별도로 둔 한성의 사직단과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그 단의 크기와 높이는 어떻게 되는가?
한성의 사직단 제도를 놓고 태조 대부터 세종 대까지 치열하게 논쟁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는 더욱더 의아해지는 지점이다. 왜 지방의 사직단에 대해서는 이러한 논쟁도, 결과물인 규정도 보이지 않는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단의 제도를 통일하기 어려웠기에 차라리 규정을 넣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세종 대에는 신사들을 폐지하고 신상을 없애거나 신주를 다시 쓰는 등 음사 폐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몇차례 점검에도 신주의 문구 같은 간단한 것조차 통일되지 않았다. 관리도 허술했다. 신성하게 관리되어야 할 제단들이련만 평상시에는 무심히 가축을 풀어놓고 사람들이 지나다니곤 했다.(<조선을 읽는 법, 단>) 권력만으로 이질적인 새 장소가 사람들에게 성소의 감각을 불러오기는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업무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 전례서에 지방 사직단의 제도 규정을 넣지 못한 것은 이러한 어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규정이 없으면 맞출 수도 없지만 틀리는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현재까지 남아 있거나 발굴된 사례를 보면, 지방 사직단이 일관되고 통일된 제도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의 크기나 높이 모두 제각각이며, 단 이외 담장이나 신실 같은 전체적인 시설물 구성 역시 통일되지 않았다. 조선은 전국의 읍치마다 사직단을 설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단의 규모와 제도를 통일하는 데는 실패, 혹은 무관심했다.
문제는 지금이다
일제강점기 지방 사직단의 제례는 폐지되고, 단의 부지는 국유지로 편입됐다가 민간에 불하되거나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다. 그렇게 사라진 지방 사직단과 사직제를 최근에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통과 역사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우려되는 지점들이 있다. 제각각이었던 지방 사직단을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복원하며 서울 사직단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거나, 근거 없는 수치를 가지고 사실상 새로 만들어내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잊힌 원장소를 찾고, 정확한 지식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 발굴할 수 있다면 하고,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표지석이라도 세우거나 관리의 방향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정말 안타까운 사례가 삼척 사직단이다. 삼척부사 허목이 사직단을 중수하며 남긴 기록이 구체적이고 기록과 일치하는 발굴 결과까지 나온, 거의 유일한 지방 사직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관심이 부족했던 1990년대, 부지는 그대로 아파트 단지로 개발됐고, 사직단은 다른 장소에 원모습과는 무관하게 ‘복원’됐다.
한편 일제강점기 사직단이 일본식 신사 같은 장소로 전용되거나 민간에서 제례 장소로 전유한 사례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례들이야말로 지역 고유의 이야기로서 그 지역만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던질 필요가 있다. 이제 농경에는 별 관심도 없는 사회에서 사직단을 만들어 무엇을 기원하자는 것인가. 중앙의 일원적 통치를 상징하는 사직단을 지자체가 주도해서 만드는 이 아이러니는 또 무엇인가.
문서와 지도들을 뒤져 원장소를 추적하고 동네 주민의 기억을 모으는 작업은 당장 사직단을 짓고 옛 복식을 입고 의례를 거행하는 것만큼 폼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중요하지만 폼은 나지 않는 일을 우리는 ‘기초’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당장의 가시적인 성취에만 급급해 기초를 외면하고 고민하기를 멈추는 한, 풍부한 가능성을 품은 단단한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8대 총무원장 선거가 진우·정념·경우 스님의 3파전으로 본격화했다. 세 후보는 후보등록 첫날인 11일 나란히 등록을 마치면서 2017년 제35대 총무원장 선거 이후 9년 만에 경선이 펼쳐지게 됐다.
현 총무원장인 진우 스님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한국 불교의 새로운 백 년을 열겠다”면서 비공개 출마 선언을 하고 연임 도전을 밝혔다. 출마 선언문에서 진우 스님은 “사부대중이 함께 이뤄낸 종단의 안정과 변화를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이제는 종단의 안정이라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 더 큰 도약을 향해 진일보해야 할 때”라고 출마 이유를 설명했다.
2022년 9월 취임한 진우 스님은 지난 4년간 종단의 숙원과 현안을 해결하고 불교의 대사회적 위상을 높였다고 자평했다. 추대제부터 직선제까지 다양한 대안을 열어놓은 선거제도 개편을 비롯해 비구니 스님의 권익 향상, 승려 완전복지, 중앙 권한 교구 이양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진우 스님은 후보등록 첫날 중앙종회의원들의 공개지지를 이끌어냈다. 총무원장 선거 투표권을 가진 중앙종회의원 81명 중 53명은 이날 진우 스님 지지선언문을 냈다.
강원도 강릉 출신인 진우 스님은 백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용흥사·백양사 주지, 조계종 교육원장 등을 역임했다. 진우 스님은 2022년 37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조계종 최대 종책모임인 불교광장의 합의 추대를 받아 단독 입후보했고, 투표 없이 당선됐다. 진우 스님의 이날 후보 등록으로 총무원장 권한은 총무부장 정문 스님이 대행하게 됐다.
이번 선거는 지난 4년간 ‘안정과 성과’를 내세운 진우 스님과 종단 운영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정념·경우 스님이 맞서는 구도로 출발했다. 다만 두 도전자가 현 집행부와 각을 세우는 지점과 정치적 기반에는 차이가 있다. 정념 스님은 지난 6일 출마 선언에서 총무원장 단임을 약속하고, 종단 운영과 의사결정의 폐쇄성을 지적하며 중앙 권한을 교구로 이양해 교구자치를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20년 넘게 월정사를 이끌며 쌓은 경험을 종단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합의와 소통’을 내건 경우 스님은 “투명성을 바탕으로 종도들에게 신뢰받는 종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특히 경우 스님의 출마가 주목받는 이유는 불교광장과의 관계 때문이다. 4년 전 진우 스님을 합의 추대했던 이 종책모임의 회장을 최근까지 맡았던 경우 스님은 지난달 22일 회장직을 사퇴하고 진우 스님의 경쟁자로 나섰다.
향후 선거전 최대 변수 중 하나는 정념·경우 스님의 후보 단일화 여부다. 두 스님은 서로의 출마선언 자리에 참석하는 등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정념 스님도 출마 기자회견에서 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두 후보가 단일화할 경우 현직 총무원장과 단일 대항후보가 맞서는 양강구도로 재편될 수 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는 두 지지표의 단순 합산이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념 스님은 오랫동안 월정사를 이끌며 교구 중심으로 기반을 다졌고 경우 스님은 중앙종회 종책모임과 선운사를 중심으로 활동해 두 후보의 지지기반과 인적 네트워크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단일화의 파급력은 방식과 명분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 판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분수령은 오는 19~23일로 예정된 교구별 선거인단 선출이다. 총무원장 선거인단은 중앙종회의원 81명과 전국 24개 교구본사에서 각각 10명씩 뽑는 240명 등 모두 321명으로 구성된다. 교구 선거인단은 각 교구종회에서 본사 주지를 포함해 10명씩 선출한다. 구체적 선출 방법과 절차가 별도로 규정되어 있지 않아 선거인단 구성 과정에서 교구본사 주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전체 선거인단의 약 75%를 차지하는 교구 선거인단이 어떻게 구성되느냐가 향후 판세를 가늠할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3파전이 유지될 경우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올지도 관건이다.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최고 득표자와 차점자를 대상으로 다시 투표한다. 차기 총무원장 선거는 다음 달 3일 치러진다.
올 여름 휴가철 인천공항을 통해 가장 많이 간 해외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지난 7월 25일~8월 10일 여름 성수기 동안 391만6084명이 인천공항을 이용했다고 11일 밝혔다. 하루 평균 23만358명이 출국한 셈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8% 증가한 것으로 역대 여름 성수기 중 최대 규모다.
지난 2일에는 하루 이용객이 24만7200명으로, 설 연휴기간인 지난 2월 14일 24만7104명을 넘어섰다.
공항 이용객이 가장 많이 떠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 출국자는 99만6723명으로 전체 이용객의 25.35%를 차지했다. 동남아가 22.2%(86만2214명)로 뒤를 이었으며, 중국(21.6%·83만8298명), 동북아(9.9%·38만5513명) 순이었다.
인천공항공사는 이번 여름 성수기 동안 출국장 조기 개방과 스마트패스 전용 출국장 확대, 여객 안내 사이니지 신규 제작 및 배치 등으로 큰 혼잡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인천공항공사는 오는 15~17일까지 사흘간 이어지는 연휴에도 성수기 수준의 대응체제를 유지할 계획이다.
김범호 인천공항공사 사장직무대행은 “올 여름 항공 성수기 기간 여객 증가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안정적인 공항 운영을 가능하게 한 공항 종사자의 노고와 국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심각한 자연재해는 무엇 때문일까? 음양오행의 논리에 따라 인간과 자연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전근대 시기에는 기후의 변괴나 괴이한 자연 현상은 인간, 특히 통치자 때문에 벌어진다고 여기곤 했다. 그래서 재해가 발생하면, 통치자는 하늘, 별, 산천 등 온갖 제사처에서 마음을 다해 기원하곤 했다. 즉위한 지 1개월 남짓 된 태종은 경연에서 이에 의문을 표시했다. 이런 제사 중에는 음사, 즉 바르지 못한 제사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런 것들은 없애야 하지 않을까?
조선 초 여러 음사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산천에서 벌어지는 굿판이었다. 영험하다고 소문난 산천의 신사를 찾아 무당을 동원해 노래하고 춤추며 벌이는 굿판은 왕실부터 일반 서민까지 모두가 행했다. 연말연시 같은 때에는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행렬이 길을 메웠고, 병자나 가뭄·홍수 같은 재해가 있을 때는 더욱 간절한 기도 행렬이 이어지곤 했다. 유교를 국시로 세운 조선 정부가 볼 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무당을 동원한 굿판 자체가 나라의 이념적 지향에 맞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경전에서 제후만이 지낼 수 있다고 한 산천의 제사를 서민들까지 지내는 참람함도 문제였다. 남녀가 굿판에 섞여 지내는 바람에 풍기가 문란해지는 것도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폐지하기는 어려웠다. 강압적으로 금지했다가 무슨 재해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백성들이 이게 다 음사 금지 때문이라고 탓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굿판이 진정 영검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힘이 실리지 못한 것도 있었다. 정종은 경연 자리에서 감악산신이 몸에 내려 펄떡펄떡 뛰던 기생을 본 경험을 얘기하며 귀신의 도를 허탄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경연을 주관한 하윤은 이러한 임금의 주장을 딱히 비판하지 않았다.(<정종실록>, 정종 2년 1월10일) 사실 관리들도 굿판에서 무당들과 신명 나게 춤을 추던 시대였다.
이런 시절, 경연에 참여한 응교 김첨은 태종의 질문에 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옛 제도에 따라 이사(里社)의 법을 세워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제사하게 하면 백성이 모두 기쁘게 따르고 음사도 근절될 것입니다.”(<정종실록> 권6, 태종 즉위년 12월18일) 지방마다 사직단을 세워 백성들이 음사 대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제사 지내는 장소로, ‘종묘사직’으로 병칭되며 왕조 자체를 상징하고 수도를 구성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 유교적 제단이다. 위로는 천자부터 아래로는 벼슬 없는 이들도 둘 수 있다고 경전에 나온 단이기도 하다.
김첨의 아이디어는 몇년 후 현실화한다. 1406년(태종 6) 한양 재천도가 행해진 직후, 예조에서는 지방마다 사직단을 설치하자고 건의한다. 전국의 사찰과 신사(神祠)를 혁파하고 그 재산을 향교 등으로 옮기는 동시에 사직단 설치까지 이어진 이때의 개혁은 조선에서 이념의 전환을 이뤄낸 방식을 보여준다.
음사가 폐지된 세상에서 향교의 학생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을 보좌하여 사직단과 문묘에서 제례를 올리게 된다. 중앙과 지방에서 같은 날 일제히 펼쳐지는 이들 유교식 제례는 새로운 이념을 체화한 이들에 의해 행해지며 국가의 이념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단, 이상이 현실에서 그렇게 매끄럽게 구현될 리 없다는 점만 뺀다면.
통일되지 않은 지방의 사직단
“지방의 모든 읍치(행정 중심지)에 사직단을 설치한다.” 굉장히 분명하지만, 실제로 구현을 하려면 세부적인 지침이 필요하다. 어디에 설치해야 하는가? 어떠한 모양과 크기로 설치해야 하는가? 단에서 제례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기와 위패 등은 어디에서 만드는가? 단과 물품에 대한 평상시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전에 할 법한 질문들은 물론, 실제 구현 과정에서 새롭게 생긴 질문들도 빠르게 해결이 되어야 하나의 제도가 안착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권위 있는 문서에 기록됨으로써 ‘불변의 지침’이라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
의례 분야에서 이러한 권위를 지닌 책이 바로 성종 대 완성된 <국조오례의>와 <국조오례서례>다. 이 책들에는 중앙의 여러 단에 대한 정연한 규정이 적혀 있다. 그런데 정작 지방 사직단의 위치나 제도에 대해서는 “주현의 사직단은 성 서쪽에 있다. 사와 직은 하나의 단을 공유하며 석주가 없다”는 아주 범범한 규정만 나와 있다.(<국조오례서례> 단묘도설) 성 서쪽이라니 범위가 너무 넓다. 더구나 성이 없는 읍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와 직이 한 단을 공유한다 하니, 사단과 직단을 별도로 둔 한성의 사직단과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그 단의 크기와 높이는 어떻게 되는가?
한성의 사직단 제도를 놓고 태조 대부터 세종 대까지 치열하게 논쟁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는 더욱더 의아해지는 지점이다. 왜 지방의 사직단에 대해서는 이러한 논쟁도, 결과물인 규정도 보이지 않는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단의 제도를 통일하기 어려웠기에 차라리 규정을 넣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세종 대에는 신사들을 폐지하고 신상을 없애거나 신주를 다시 쓰는 등 음사 폐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몇차례 점검에도 신주의 문구 같은 간단한 것조차 통일되지 않았다. 관리도 허술했다. 신성하게 관리되어야 할 제단들이련만 평상시에는 무심히 가축을 풀어놓고 사람들이 지나다니곤 했다.(<조선을 읽는 법, 단>) 권력만으로 이질적인 새 장소가 사람들에게 성소의 감각을 불러오기는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업무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 전례서에 지방 사직단의 제도 규정을 넣지 못한 것은 이러한 어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규정이 없으면 맞출 수도 없지만 틀리는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현재까지 남아 있거나 발굴된 사례를 보면, 지방 사직단이 일관되고 통일된 제도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의 크기나 높이 모두 제각각이며, 단 이외 담장이나 신실 같은 전체적인 시설물 구성 역시 통일되지 않았다. 조선은 전국의 읍치마다 사직단을 설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단의 규모와 제도를 통일하는 데는 실패, 혹은 무관심했다.
문제는 지금이다
일제강점기 지방 사직단의 제례는 폐지되고, 단의 부지는 국유지로 편입됐다가 민간에 불하되거나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다. 그렇게 사라진 지방 사직단과 사직제를 최근에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통과 역사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우려되는 지점들이 있다. 제각각이었던 지방 사직단을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복원하며 서울 사직단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거나, 근거 없는 수치를 가지고 사실상 새로 만들어내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잊힌 원장소를 찾고, 정확한 지식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 발굴할 수 있다면 하고,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표지석이라도 세우거나 관리의 방향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정말 안타까운 사례가 삼척 사직단이다. 삼척부사 허목이 사직단을 중수하며 남긴 기록이 구체적이고 기록과 일치하는 발굴 결과까지 나온, 거의 유일한 지방 사직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관심이 부족했던 1990년대, 부지는 그대로 아파트 단지로 개발됐고, 사직단은 다른 장소에 원모습과는 무관하게 ‘복원’됐다.
한편 일제강점기 사직단이 일본식 신사 같은 장소로 전용되거나 민간에서 제례 장소로 전유한 사례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례들이야말로 지역 고유의 이야기로서 그 지역만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던질 필요가 있다. 이제 농경에는 별 관심도 없는 사회에서 사직단을 만들어 무엇을 기원하자는 것인가. 중앙의 일원적 통치를 상징하는 사직단을 지자체가 주도해서 만드는 이 아이러니는 또 무엇인가.
문서와 지도들을 뒤져 원장소를 추적하고 동네 주민의 기억을 모으는 작업은 당장 사직단을 짓고 옛 복식을 입고 의례를 거행하는 것만큼 폼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중요하지만 폼은 나지 않는 일을 우리는 ‘기초’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당장의 가시적인 성취에만 급급해 기초를 외면하고 고민하기를 멈추는 한, 풍부한 가능성을 품은 단단한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8대 총무원장 선거가 진우·정념·경우 스님의 3파전으로 본격화했다. 세 후보는 후보등록 첫날인 11일 나란히 등록을 마치면서 2017년 제35대 총무원장 선거 이후 9년 만에 경선이 펼쳐지게 됐다.
현 총무원장인 진우 스님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한국 불교의 새로운 백 년을 열겠다”면서 비공개 출마 선언을 하고 연임 도전을 밝혔다. 출마 선언문에서 진우 스님은 “사부대중이 함께 이뤄낸 종단의 안정과 변화를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이제는 종단의 안정이라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 더 큰 도약을 향해 진일보해야 할 때”라고 출마 이유를 설명했다.
2022년 9월 취임한 진우 스님은 지난 4년간 종단의 숙원과 현안을 해결하고 불교의 대사회적 위상을 높였다고 자평했다. 추대제부터 직선제까지 다양한 대안을 열어놓은 선거제도 개편을 비롯해 비구니 스님의 권익 향상, 승려 완전복지, 중앙 권한 교구 이양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진우 스님은 후보등록 첫날 중앙종회의원들의 공개지지를 이끌어냈다. 총무원장 선거 투표권을 가진 중앙종회의원 81명 중 53명은 이날 진우 스님 지지선언문을 냈다.
강원도 강릉 출신인 진우 스님은 백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용흥사·백양사 주지, 조계종 교육원장 등을 역임했다. 진우 스님은 2022년 37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조계종 최대 종책모임인 불교광장의 합의 추대를 받아 단독 입후보했고, 투표 없이 당선됐다. 진우 스님의 이날 후보 등록으로 총무원장 권한은 총무부장 정문 스님이 대행하게 됐다.
이번 선거는 지난 4년간 ‘안정과 성과’를 내세운 진우 스님과 종단 운영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정념·경우 스님이 맞서는 구도로 출발했다. 다만 두 도전자가 현 집행부와 각을 세우는 지점과 정치적 기반에는 차이가 있다. 정념 스님은 지난 6일 출마 선언에서 총무원장 단임을 약속하고, 종단 운영과 의사결정의 폐쇄성을 지적하며 중앙 권한을 교구로 이양해 교구자치를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20년 넘게 월정사를 이끌며 쌓은 경험을 종단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합의와 소통’을 내건 경우 스님은 “투명성을 바탕으로 종도들에게 신뢰받는 종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특히 경우 스님의 출마가 주목받는 이유는 불교광장과의 관계 때문이다. 4년 전 진우 스님을 합의 추대했던 이 종책모임의 회장을 최근까지 맡았던 경우 스님은 지난달 22일 회장직을 사퇴하고 진우 스님의 경쟁자로 나섰다.
향후 선거전 최대 변수 중 하나는 정념·경우 스님의 후보 단일화 여부다. 두 스님은 서로의 출마선언 자리에 참석하는 등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정념 스님도 출마 기자회견에서 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두 후보가 단일화할 경우 현직 총무원장과 단일 대항후보가 맞서는 양강구도로 재편될 수 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는 두 지지표의 단순 합산이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념 스님은 오랫동안 월정사를 이끌며 교구 중심으로 기반을 다졌고 경우 스님은 중앙종회 종책모임과 선운사를 중심으로 활동해 두 후보의 지지기반과 인적 네트워크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단일화의 파급력은 방식과 명분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 판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분수령은 오는 19~23일로 예정된 교구별 선거인단 선출이다. 총무원장 선거인단은 중앙종회의원 81명과 전국 24개 교구본사에서 각각 10명씩 뽑는 240명 등 모두 321명으로 구성된다. 교구 선거인단은 각 교구종회에서 본사 주지를 포함해 10명씩 선출한다. 구체적 선출 방법과 절차가 별도로 규정되어 있지 않아 선거인단 구성 과정에서 교구본사 주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전체 선거인단의 약 75%를 차지하는 교구 선거인단이 어떻게 구성되느냐가 향후 판세를 가늠할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3파전이 유지될 경우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올지도 관건이다.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최고 득표자와 차점자를 대상으로 다시 투표한다. 차기 총무원장 선거는 다음 달 3일 치러진다.
올 여름 휴가철 인천공항을 통해 가장 많이 간 해외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지난 7월 25일~8월 10일 여름 성수기 동안 391만6084명이 인천공항을 이용했다고 11일 밝혔다. 하루 평균 23만358명이 출국한 셈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8% 증가한 것으로 역대 여름 성수기 중 최대 규모다.
지난 2일에는 하루 이용객이 24만7200명으로, 설 연휴기간인 지난 2월 14일 24만7104명을 넘어섰다.
공항 이용객이 가장 많이 떠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 출국자는 99만6723명으로 전체 이용객의 25.35%를 차지했다. 동남아가 22.2%(86만2214명)로 뒤를 이었으며, 중국(21.6%·83만8298명), 동북아(9.9%·38만5513명) 순이었다.
인천공항공사는 이번 여름 성수기 동안 출국장 조기 개방과 스마트패스 전용 출국장 확대, 여객 안내 사이니지 신규 제작 및 배치 등으로 큰 혼잡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인천공항공사는 오는 15~17일까지 사흘간 이어지는 연휴에도 성수기 수준의 대응체제를 유지할 계획이다.
김범호 인천공항공사 사장직무대행은 “올 여름 항공 성수기 기간 여객 증가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안정적인 공항 운영을 가능하게 한 공항 종사자의 노고와 국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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