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했던 워킹맘, K-고구마 간식 ‘원조맘’이 되다
2026-08-07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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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쇼핑몰 검색창에 ‘고구마 간식’을 입력하면 비슷한 모양의 제품들이 줄줄이 뜬다. 가격은 수백 원에서 수천 원씩 차이가 난다. 소비자는 원료보다 가격을 먼저 비교하고, 중소기업은 품질보다 가격을 설명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마 간식으로 누적 판매량 1700만개를 기록한 중소기업이 있다. ‘리얼이구마’와 ‘빼빼구마’를 만든 그로위드다. 시장을 처음 열었지만 임주영 대표는 ‘원조’라는 단어를 자랑처럼 쓰지 않는다. 그 뒤에 숨겨진 ‘책임’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엄마의 불편함’에서 시작된 창업
임 대표의 창업 아이디어는 거창한 사업계획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두 아이를 키우던 평범한 엄마의 일상에서 시작됐다.
2019년 어느 날, 큰아이의 학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둘째에게 삶은 고구마와 바나나를 먹이던 그는 문득 ‘원물 그대로의 장점은 살리면서도 더 편하게 먹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작은 질문은 훗날 누적 판매량 1700만개를 기록한 고구마 간식 ‘리얼이구마’의 출발점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임 대표의 원래 직업은 식품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서는 상담교사로, 병원에서는 재활심리 상담사로 일하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해왔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는지가 결국 마음과도 연결된다”고 믿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먹거리로 이어졌다.
일하는 틈틈이 로우푸드와 스무디를 공부해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고,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뒤에는 성분표와 원산지를 꼼꼼히 확인하는 부모가 됐다. 그러나 먹거리를 공부할수록 시중 제품에 대한 아쉬움은 오히려 커졌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 아이에게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체화됐다.
하지만 제품을 만드는 것과 시장에서 인정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광고를 집행할 자금도, 소비자들에게 알려진 브랜드도 없었다. 자신이 만든 제품이 과연 시장에서 통할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 간식을 만들겠다는 초심 하나로 제품 개발에 매달렸고, 그 작은 일상의 아이디어는 결국 수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브랜드의 시작이 됐다.
“안 되면 친척들이랑 우리가 다 먹지, 정말 그 정도 마음이었어요(웃음).”
첫 생산이 시작되던 날 그는 제조공장뿐 아니라 포장재 공장까지 직접 찾았다. 자신의 브랜드가 인쇄된 포장지가 기계에서 한 장씩 완성되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머릿속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이 되는 순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예상과 달리 소비자들의 반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공동구매와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졌고, ‘죄책감 없이 줄 수 있는 간식’이라는 후기가 이어졌다. 그는 소비자들의 반응을 단순한 평가로 넘기지 않았다. 제품 사진이 올라오면 직접 댓글을 남기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떤 점이 좋았고 무엇이 아쉬웠는지 살폈고, 그렇게 쌓인 소비자들의 목소리는 다음 제품을 개발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됐다.
“그 당시엔 나와 같은 부모를 만난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분들이 남긴 이야기가 결국 제품을 개선하는 밑거름이 됐고요.”
국내 최초 제품 개발…K-고구마 간식을 꿈꾸며
‘리얼이구마’가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 임 대표는 또 한 번 도전에 나섰다. 아이들이 길고 가는 스틱 형태의 간식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 국내 최초로 츄러스 형태의 고구마 스틱 ‘빼빼구마’를 기획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제품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구마 간식의 새로운 형태를 제안하는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참고할 제품이 없었던 만큼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다. 어렵게 성형 금형을 새로 제작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원물 100% 고구마는 굵기를 조금만 바꿔도 쉽게 부러졌고, 길이를 늘리면 식감이 달라졌다. 아이들이 손에 쥐고 먹기 좋은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협력사와 1년 넘게 테스트를 반복하며 조금씩 답을 찾아갔다.
“‘이쯤하면 됐다’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아마 첨가물을 넣으면 제조 과정이 이처럼 고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먹일 수 있는가’라는 철학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었거든요.”
결국 임 대표는 원물 100%를 유지하면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업계 최초 레토르트 멸균 방식을 적용했고, 제조 공정까지 새롭게 설계했다. 그러나 성공은 오래 기쁨으로만 남지 않았다. ‘빼빼구마’가 시장에서 반응을 얻자 비슷한 형태의 제품들이 잇따라 출시됐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는 제품의 차별성보다 가격이 먼저 비교됐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도, 그 가치를 지켜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임 대표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해 연구개발과 설비에 먼저 투자하지만, 시장성이 확인되면 더 큰 자본과 유통망을 갖춘 기업들이 빠르게 뛰어든다. 이것이 중소 식품기업이 마주한 가장 큰 현실”이라며 “제품이 알려질수록 ‘왜 조금 더 비싼가’를 설명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기준을 낮추지는 않았다.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가격이 지나치게 올라 출시를 접은 제품도 있었고, 첨가물 사용을 받아들일 수 없어 개발을 중단한 사례도 적지 않았지만 원칙만큼은 지켰다. 그는 “유행은 누구나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려면 소비자가 믿고 선택한 기준을 끝까지 지키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창업 8년 차. 당시 두 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현재 16명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고구마를 활용한 건강 간식을 해외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고, 유아 간식을 넘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제품군으로도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 일을 하며 만나는 부모님들께 늘 말씀드려요. 제품을 고를 때는 앞면보다 뒷면의 성분표를 먼저 보시라고요. 언젠가 굳이 성분표를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아도 ‘룰루맘이라면 괜찮겠지’ 하고 믿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습니다.”
농인 성소수자 등이 국립국어원에 “한국수어사전에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표현을 삭제하고 대안 수어를 등재하라”고 요구했다.
‘한국농인LGBT+’와 ‘무지개행동’ 등 인권단체는 4일 서울 강서구 국립국어원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소수자 혐오 수어 삭제와 당사자가 개발한 대안 수어 등재를 요구하는 내용의 연서명을 국립국어원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연서명에는 시민 1073명과 57개 단체가 참여했다. 기자회견은 음성과 수어로 진행됐다.
이들은 한국수어사전 속 성소수자 관련 수어가 혐오와 비하 표현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수어사전상 게이와 레즈비언은 성행위로 표현한다. 결혼은 남성을 뜻하는 엄지와 여성을 뜻하는 소지(새끼손가락)를 붙여 표현한다.
한국농인LGBT+는 언어학자 자문 등을 거쳐 2021년 대안 수어 37종을 제작했다. 대안 수어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은 기존 수어의 남성과 여성을 활용해 가슴에서 앞으로 손을 뻗어 나가는 동작으로 바꿨다. 결혼은 성별 구분을 없애고 축복의 아치를 그리는 동작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국립국어원이 ‘농인 사이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안 수어 등재를 미뤄왔다고 주장했다. 우지양 한국농인LGBT+ 상임활동가는 “대안 수어를 모두가 쓰기 때문에 등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사전에 먼저 등재함으로써 대안 수어를 농사회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네덜란드는 농인 성소수자가 개발한 대안 수어를 정부 공인 수어사전에 등재했다”고 말했다.
김지연 농예술단체 누비스 대표는 “당사자로 비칠까 두려운 ‘아우팅’의 위험 속에서 실용례 증거를 가져오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수어는 문자 언어와 달리 영상으로 촬영해 남기지 않는 이상 수집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혐오 수어) 관련해서 연구를 상반기에 추진했고, 하반기에 농인 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며 “사전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언어를 기록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1.
오랜만에 연극을 보러 갔다. 국립극장에서 상연 중인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평일 저녁, 국립극장 대극장의 만원 관객 중 한 사람이 되어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보았다.
무대 위에서는 한 노인이,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이 노인은 자기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법 기술까지 동원된 주류 집단의 위력에 무참하게 무너진다. 그의 몰락은 지혜의 승리로 예찬되기까지 한다. 이 무슨 참담한 상황이란 말인가.
주인공이 자기 삶 전체를 부정당한 채 비참한 꼴로 전락하는데도, 늙고 추레한 대금업자의 이야기는 비극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왕후장상 같은 높은 신분이라야 비극의 주인공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것이 장르의 문법이다. 상어와 뱀을 연상시키는 샤일록이라는 이름은 악당 고리대금업자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비극의 주인공이기는 힘들다.
하지만 400여년의 시간을 건너와 21세기 서울 남산의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샤일록의 이야기라면 어떨까. 감정이입의 대상이 달라지면 현실의 비참은 어떤 정통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 된다. 원로 배우 박근형이 연기하는 샤일록의 강제 개종식 장면이 그 한복판에 있다. 타자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증오와 욕망의 얽힘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흥건하다.
2.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핵심은 유명한 법정 이야기에 있다. 샤일록은 베니스의 귀족 상인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그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잡았다.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이라고 계약서에 되어 있다. 그러니까 돈을 못 갚으면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이겠다.
안토니오는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했고 결국 계약을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 변장한 여성 판사 포셔의 판결이 샤일록을 제지한다. 살만 가져가고 피는 가져가지 마라. 이게 무슨 말인가. 떼어낸 살은 정확하게 1파운드라야 한다. 넘치거나 모자라면 거꾸로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포셔는 여기에서 한술 더 뜬다. 베니스 시민의 목숨을 노린 자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숨을 대공의 처분에 맡겨야 한다는 법률의 존재를 알려준다.
샤일록은 결국 법정에서 가짜 판사 포셔에게 항복하고 만다. 목숨을 건지는 대신 기독교로 개종당하고 재산의 절반을 내놓아야 했다. 이런 처분은 유대교도의 잔혹함에 맞서는 기독교도의 관대함이라 예찬된다. 기독교인의 지혜가 이방인의 잔혹함을 제어하는 이 장면이 드라마의 절정에 해당한다. 악당이 응징당하는 이야기라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립극단은 원작이 지닌 아이러니를 발굴해냄으로써 극의 성격을 바꾸어놓는다. 새로운 클라이맥스를 연출함으로써 원작의 절정을 덮어써버리는 것이다. 늙은 샤일록의 강제 개종식 장면이 그것이다.
86세의 박근형이 연기하는 샤일록은 개종식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흐느낀다. 비단옷 차림의 훤칠한 베니스의 귀족들이 한 인간의 비참을 옹위하고 있다. 법 기술자가 개입한 재판이 공정한 것인가. 법리의 적용은 제대로 된 것인가. 21세기 서울의 관객들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나.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샤일록을 고리대금업자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금업자인 것은 맞지만, 베니스의 귀족 상인 안토니오와 그의 친구들이 샤일록을 모욕했던 것은, 이자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었다. 그들은 샤일록을 문자 그대로 개 취급했다.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고 뺨을 때렸다. 그의 핏줄과 민족을 경멸했다. 딸은 기독교 청년과 정분이 나서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출분한다. 샤일록이 고리대금업자라고 욕을 먹는다면, 세계의 어떤 은행업자들도 동일한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근대로의 이행기 베니스에서 샤일록이 집단적 모욕과 사회적 린치를 당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은 표면적일 뿐이다. 이방인이기 때문이라 말하면 조금 비슷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근대 자본주의 태동기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역설 때문이라 해야 한다. 바보들의 자기 경멸이 곧 그것이다.
3.
중세 기독교의 교회법은 구약의 율법서를 따라 공동체 내부에서 이자 받는 것을 금했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가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준 것은 이런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자 받기를 금하는 교리 곁에는, 돈은 새끼 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있다. 여기에서 화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일 뿐이다. 돈이 돈을 낳는 경제, 자본주의가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도 자기 집단 내부에서는 이자를 받지 않았지만 외부자들에게는 이자를 받았다. 네덜란드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상업 사회에 자리 잡은 네덜란드 칼뱅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이자를 인정하되, 개인들 간 거래는 6%, 상인들 간 위험한 거래는 8%로 제한했다. 주식회사가 출현하고 증권거래가 시작되는 17세기의 일이었다.
샤일록은 돈을 빌려주고도 이자를 받지 않는 안토니오를 바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안토니오가 바보인 까닭은 다른 곳에 있다. 상업 활동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은 괜찮고, 대금업으로 이문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란 말인가. 이 항변에 안토니오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내세울 것은 단지 교회법밖에 없으니 그가 샤일록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안토니오는 트리폴리, 리스본, 영국, 멕시코, 인도, 바바리 등지에 무역선을 보내는 큰 상인이다. 극중에서 이 배들이 모두 깨져서 파산 지경이라는 소문이 돈다. 안토니오의 사업은 난파와 약탈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점에서 모험과 도박에 가깝다. 선단을 이끌고 무역 길에 오른 선장은 영웅의 풍모를 지니지만, 원양에 배를 보내놓고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이 시기 선주의 초조함은 도박사의 것에 가깝다. 반면에 샤일록의 대금업은 돈을 심어 이자를 수확하는 농업인이나 새끼양의 탄생을 기다리는 목축업자의 분위기를 지닌다. 귀족 상인의 호쾌한 초조 건너편에, 유대인 대금업자의 평온한 불안이 맞서 있는 셈이다. 근대인의 공허감이 만들어내는 존재론적 불안이 바탕에 있다.
근대적 주체의 심정은 바보와 속물이 합해지는 곳에서 출현한다. 존재론적 불안은 노름의 호쾌함으로 방어하고, 바보의 초조는 속물의 계산력으로 보충한다. 운명을 도박하는 바보가 계산하는 속물이 되면 근대인이 탄생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라는 주식회사의 출현이 그 대표적 표상이다. 원양 무역의 리스크를 주식회사 형태로 분산함으로써, 그들은 위험한 뱃길에 이익이 열리는 밭고랑을 만들었다.
4.
외부자들에 대한 개방 없이는 근대성도 자본주의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쌍방향 수혜의 진짜 거래는 서로 다른 공동체들 간 만남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베니스의 청년 귀족들이 보여주는 이방인 샤일록에 대한 증오심은 셰익스피어 시절의 런던이 목격하고 있는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에 해당한다.
이방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꽃피웠던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이다. 세계 최초로 출현했던 암스테르담의 주식시장은 유대인 트레이더들이 참여함으로써 독자적 금융시장으로 성장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주민들이라는 사실이다. 전통적 트레이더들이 이방의 상인들과 거래하는 순간, 교환에 필수적인 신용은 인격적 고유성의 수준을 넘어 투명하고 객관적인 것이 된다. 특정 인격에 대한 신용이 아니라, 신용 자체가 인격이 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가능해진다.
샤일록의 강제 개종식은 21세기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벌어졌다. 박근형이 연기하는 이 장면의 그로테스크함과 비극성은, 샤일록을 악마화한 400여년 전 기독교도들 때문이 아니다. 400세가 된 자본주의 체제에 살면서도, 자기 안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양성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괴물들, 흑화한 무지가 내뿜는 섬뜩함 때문이다. 이 정서적 좀비들은 자기들의 혐오 행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임을, 자기 경멸이자 혐오의 실천임을 모르고 있다. 끔찍하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마 간식으로 누적 판매량 1700만개를 기록한 중소기업이 있다. ‘리얼이구마’와 ‘빼빼구마’를 만든 그로위드다. 시장을 처음 열었지만 임주영 대표는 ‘원조’라는 단어를 자랑처럼 쓰지 않는다. 그 뒤에 숨겨진 ‘책임’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엄마의 불편함’에서 시작된 창업
임 대표의 창업 아이디어는 거창한 사업계획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두 아이를 키우던 평범한 엄마의 일상에서 시작됐다.
2019년 어느 날, 큰아이의 학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둘째에게 삶은 고구마와 바나나를 먹이던 그는 문득 ‘원물 그대로의 장점은 살리면서도 더 편하게 먹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작은 질문은 훗날 누적 판매량 1700만개를 기록한 고구마 간식 ‘리얼이구마’의 출발점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임 대표의 원래 직업은 식품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서는 상담교사로, 병원에서는 재활심리 상담사로 일하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해왔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는지가 결국 마음과도 연결된다”고 믿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먹거리로 이어졌다.
일하는 틈틈이 로우푸드와 스무디를 공부해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고,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뒤에는 성분표와 원산지를 꼼꼼히 확인하는 부모가 됐다. 그러나 먹거리를 공부할수록 시중 제품에 대한 아쉬움은 오히려 커졌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 아이에게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체화됐다.
하지만 제품을 만드는 것과 시장에서 인정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광고를 집행할 자금도, 소비자들에게 알려진 브랜드도 없었다. 자신이 만든 제품이 과연 시장에서 통할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 간식을 만들겠다는 초심 하나로 제품 개발에 매달렸고, 그 작은 일상의 아이디어는 결국 수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브랜드의 시작이 됐다.
“안 되면 친척들이랑 우리가 다 먹지, 정말 그 정도 마음이었어요(웃음).”
첫 생산이 시작되던 날 그는 제조공장뿐 아니라 포장재 공장까지 직접 찾았다. 자신의 브랜드가 인쇄된 포장지가 기계에서 한 장씩 완성되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머릿속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이 되는 순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예상과 달리 소비자들의 반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공동구매와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졌고, ‘죄책감 없이 줄 수 있는 간식’이라는 후기가 이어졌다. 그는 소비자들의 반응을 단순한 평가로 넘기지 않았다. 제품 사진이 올라오면 직접 댓글을 남기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떤 점이 좋았고 무엇이 아쉬웠는지 살폈고, 그렇게 쌓인 소비자들의 목소리는 다음 제품을 개발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됐다.
“그 당시엔 나와 같은 부모를 만난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분들이 남긴 이야기가 결국 제품을 개선하는 밑거름이 됐고요.”
국내 최초 제품 개발…K-고구마 간식을 꿈꾸며
‘리얼이구마’가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 임 대표는 또 한 번 도전에 나섰다. 아이들이 길고 가는 스틱 형태의 간식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 국내 최초로 츄러스 형태의 고구마 스틱 ‘빼빼구마’를 기획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제품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구마 간식의 새로운 형태를 제안하는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참고할 제품이 없었던 만큼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다. 어렵게 성형 금형을 새로 제작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원물 100% 고구마는 굵기를 조금만 바꿔도 쉽게 부러졌고, 길이를 늘리면 식감이 달라졌다. 아이들이 손에 쥐고 먹기 좋은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협력사와 1년 넘게 테스트를 반복하며 조금씩 답을 찾아갔다.
“‘이쯤하면 됐다’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아마 첨가물을 넣으면 제조 과정이 이처럼 고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먹일 수 있는가’라는 철학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었거든요.”
결국 임 대표는 원물 100%를 유지하면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업계 최초 레토르트 멸균 방식을 적용했고, 제조 공정까지 새롭게 설계했다. 그러나 성공은 오래 기쁨으로만 남지 않았다. ‘빼빼구마’가 시장에서 반응을 얻자 비슷한 형태의 제품들이 잇따라 출시됐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는 제품의 차별성보다 가격이 먼저 비교됐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도, 그 가치를 지켜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임 대표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해 연구개발과 설비에 먼저 투자하지만, 시장성이 확인되면 더 큰 자본과 유통망을 갖춘 기업들이 빠르게 뛰어든다. 이것이 중소 식품기업이 마주한 가장 큰 현실”이라며 “제품이 알려질수록 ‘왜 조금 더 비싼가’를 설명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기준을 낮추지는 않았다.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가격이 지나치게 올라 출시를 접은 제품도 있었고, 첨가물 사용을 받아들일 수 없어 개발을 중단한 사례도 적지 않았지만 원칙만큼은 지켰다. 그는 “유행은 누구나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려면 소비자가 믿고 선택한 기준을 끝까지 지키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창업 8년 차. 당시 두 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현재 16명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고구마를 활용한 건강 간식을 해외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고, 유아 간식을 넘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제품군으로도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 일을 하며 만나는 부모님들께 늘 말씀드려요. 제품을 고를 때는 앞면보다 뒷면의 성분표를 먼저 보시라고요. 언젠가 굳이 성분표를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아도 ‘룰루맘이라면 괜찮겠지’ 하고 믿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습니다.”
농인 성소수자 등이 국립국어원에 “한국수어사전에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표현을 삭제하고 대안 수어를 등재하라”고 요구했다.
‘한국농인LGBT+’와 ‘무지개행동’ 등 인권단체는 4일 서울 강서구 국립국어원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소수자 혐오 수어 삭제와 당사자가 개발한 대안 수어 등재를 요구하는 내용의 연서명을 국립국어원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연서명에는 시민 1073명과 57개 단체가 참여했다. 기자회견은 음성과 수어로 진행됐다.
이들은 한국수어사전 속 성소수자 관련 수어가 혐오와 비하 표현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수어사전상 게이와 레즈비언은 성행위로 표현한다. 결혼은 남성을 뜻하는 엄지와 여성을 뜻하는 소지(새끼손가락)를 붙여 표현한다.
한국농인LGBT+는 언어학자 자문 등을 거쳐 2021년 대안 수어 37종을 제작했다. 대안 수어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은 기존 수어의 남성과 여성을 활용해 가슴에서 앞으로 손을 뻗어 나가는 동작으로 바꿨다. 결혼은 성별 구분을 없애고 축복의 아치를 그리는 동작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국립국어원이 ‘농인 사이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안 수어 등재를 미뤄왔다고 주장했다. 우지양 한국농인LGBT+ 상임활동가는 “대안 수어를 모두가 쓰기 때문에 등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사전에 먼저 등재함으로써 대안 수어를 농사회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네덜란드는 농인 성소수자가 개발한 대안 수어를 정부 공인 수어사전에 등재했다”고 말했다.
김지연 농예술단체 누비스 대표는 “당사자로 비칠까 두려운 ‘아우팅’의 위험 속에서 실용례 증거를 가져오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수어는 문자 언어와 달리 영상으로 촬영해 남기지 않는 이상 수집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혐오 수어) 관련해서 연구를 상반기에 추진했고, 하반기에 농인 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며 “사전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언어를 기록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1.
오랜만에 연극을 보러 갔다. 국립극장에서 상연 중인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평일 저녁, 국립극장 대극장의 만원 관객 중 한 사람이 되어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보았다.
무대 위에서는 한 노인이,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이 노인은 자기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법 기술까지 동원된 주류 집단의 위력에 무참하게 무너진다. 그의 몰락은 지혜의 승리로 예찬되기까지 한다. 이 무슨 참담한 상황이란 말인가.
주인공이 자기 삶 전체를 부정당한 채 비참한 꼴로 전락하는데도, 늙고 추레한 대금업자의 이야기는 비극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왕후장상 같은 높은 신분이라야 비극의 주인공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것이 장르의 문법이다. 상어와 뱀을 연상시키는 샤일록이라는 이름은 악당 고리대금업자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비극의 주인공이기는 힘들다.
하지만 400여년의 시간을 건너와 21세기 서울 남산의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샤일록의 이야기라면 어떨까. 감정이입의 대상이 달라지면 현실의 비참은 어떤 정통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 된다. 원로 배우 박근형이 연기하는 샤일록의 강제 개종식 장면이 그 한복판에 있다. 타자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증오와 욕망의 얽힘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흥건하다.
2.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핵심은 유명한 법정 이야기에 있다. 샤일록은 베니스의 귀족 상인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그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잡았다.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이라고 계약서에 되어 있다. 그러니까 돈을 못 갚으면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이겠다.
안토니오는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했고 결국 계약을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 변장한 여성 판사 포셔의 판결이 샤일록을 제지한다. 살만 가져가고 피는 가져가지 마라. 이게 무슨 말인가. 떼어낸 살은 정확하게 1파운드라야 한다. 넘치거나 모자라면 거꾸로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포셔는 여기에서 한술 더 뜬다. 베니스 시민의 목숨을 노린 자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숨을 대공의 처분에 맡겨야 한다는 법률의 존재를 알려준다.
샤일록은 결국 법정에서 가짜 판사 포셔에게 항복하고 만다. 목숨을 건지는 대신 기독교로 개종당하고 재산의 절반을 내놓아야 했다. 이런 처분은 유대교도의 잔혹함에 맞서는 기독교도의 관대함이라 예찬된다. 기독교인의 지혜가 이방인의 잔혹함을 제어하는 이 장면이 드라마의 절정에 해당한다. 악당이 응징당하는 이야기라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립극단은 원작이 지닌 아이러니를 발굴해냄으로써 극의 성격을 바꾸어놓는다. 새로운 클라이맥스를 연출함으로써 원작의 절정을 덮어써버리는 것이다. 늙은 샤일록의 강제 개종식 장면이 그것이다.
86세의 박근형이 연기하는 샤일록은 개종식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흐느낀다. 비단옷 차림의 훤칠한 베니스의 귀족들이 한 인간의 비참을 옹위하고 있다. 법 기술자가 개입한 재판이 공정한 것인가. 법리의 적용은 제대로 된 것인가. 21세기 서울의 관객들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나.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샤일록을 고리대금업자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금업자인 것은 맞지만, 베니스의 귀족 상인 안토니오와 그의 친구들이 샤일록을 모욕했던 것은, 이자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었다. 그들은 샤일록을 문자 그대로 개 취급했다.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고 뺨을 때렸다. 그의 핏줄과 민족을 경멸했다. 딸은 기독교 청년과 정분이 나서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출분한다. 샤일록이 고리대금업자라고 욕을 먹는다면, 세계의 어떤 은행업자들도 동일한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근대로의 이행기 베니스에서 샤일록이 집단적 모욕과 사회적 린치를 당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은 표면적일 뿐이다. 이방인이기 때문이라 말하면 조금 비슷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근대 자본주의 태동기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역설 때문이라 해야 한다. 바보들의 자기 경멸이 곧 그것이다.
3.
중세 기독교의 교회법은 구약의 율법서를 따라 공동체 내부에서 이자 받는 것을 금했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가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준 것은 이런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자 받기를 금하는 교리 곁에는, 돈은 새끼 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있다. 여기에서 화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일 뿐이다. 돈이 돈을 낳는 경제, 자본주의가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도 자기 집단 내부에서는 이자를 받지 않았지만 외부자들에게는 이자를 받았다. 네덜란드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상업 사회에 자리 잡은 네덜란드 칼뱅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이자를 인정하되, 개인들 간 거래는 6%, 상인들 간 위험한 거래는 8%로 제한했다. 주식회사가 출현하고 증권거래가 시작되는 17세기의 일이었다.
샤일록은 돈을 빌려주고도 이자를 받지 않는 안토니오를 바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안토니오가 바보인 까닭은 다른 곳에 있다. 상업 활동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은 괜찮고, 대금업으로 이문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란 말인가. 이 항변에 안토니오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내세울 것은 단지 교회법밖에 없으니 그가 샤일록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안토니오는 트리폴리, 리스본, 영국, 멕시코, 인도, 바바리 등지에 무역선을 보내는 큰 상인이다. 극중에서 이 배들이 모두 깨져서 파산 지경이라는 소문이 돈다. 안토니오의 사업은 난파와 약탈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점에서 모험과 도박에 가깝다. 선단을 이끌고 무역 길에 오른 선장은 영웅의 풍모를 지니지만, 원양에 배를 보내놓고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이 시기 선주의 초조함은 도박사의 것에 가깝다. 반면에 샤일록의 대금업은 돈을 심어 이자를 수확하는 농업인이나 새끼양의 탄생을 기다리는 목축업자의 분위기를 지닌다. 귀족 상인의 호쾌한 초조 건너편에, 유대인 대금업자의 평온한 불안이 맞서 있는 셈이다. 근대인의 공허감이 만들어내는 존재론적 불안이 바탕에 있다.
근대적 주체의 심정은 바보와 속물이 합해지는 곳에서 출현한다. 존재론적 불안은 노름의 호쾌함으로 방어하고, 바보의 초조는 속물의 계산력으로 보충한다. 운명을 도박하는 바보가 계산하는 속물이 되면 근대인이 탄생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라는 주식회사의 출현이 그 대표적 표상이다. 원양 무역의 리스크를 주식회사 형태로 분산함으로써, 그들은 위험한 뱃길에 이익이 열리는 밭고랑을 만들었다.
4.
외부자들에 대한 개방 없이는 근대성도 자본주의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쌍방향 수혜의 진짜 거래는 서로 다른 공동체들 간 만남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베니스의 청년 귀족들이 보여주는 이방인 샤일록에 대한 증오심은 셰익스피어 시절의 런던이 목격하고 있는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에 해당한다.
이방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꽃피웠던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이다. 세계 최초로 출현했던 암스테르담의 주식시장은 유대인 트레이더들이 참여함으로써 독자적 금융시장으로 성장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주민들이라는 사실이다. 전통적 트레이더들이 이방의 상인들과 거래하는 순간, 교환에 필수적인 신용은 인격적 고유성의 수준을 넘어 투명하고 객관적인 것이 된다. 특정 인격에 대한 신용이 아니라, 신용 자체가 인격이 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가능해진다.
샤일록의 강제 개종식은 21세기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벌어졌다. 박근형이 연기하는 이 장면의 그로테스크함과 비극성은, 샤일록을 악마화한 400여년 전 기독교도들 때문이 아니다. 400세가 된 자본주의 체제에 살면서도, 자기 안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양성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괴물들, 흑화한 무지가 내뿜는 섬뜩함 때문이다. 이 정서적 좀비들은 자기들의 혐오 행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임을, 자기 경멸이자 혐오의 실천임을 모르고 있다.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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