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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폭발물 실험 중 파편에 얼굴 다쳐···경북 경찰특공대원 2명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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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링3
2026-08-07 13:17 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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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경찰청에서 폭발물 분석 실험을 하던 경찰특공대원 2명이 파편에 맞아 다쳤다.
5일 경북경찰청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30분쯤 안동시 정하동 경북경찰청 청사에서 폭발물 분석 실험 중 파편이 튀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경북경찰청 경찰특공대 소속 30대 경찰관 2명이 얼굴 등을 다쳤다. 이들은 안동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대구지역 대학병원으로 다시 이송됐다.
사고 당시 대원들은 금속 기반 화약류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현장에는 다친 대원 2명만 있었으며 화재 등 추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경찰은 실험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국가의 탄생
강원택 지음 | 21세기북스 | 456쪽 | 3만2000원
제헌국회 의원 김인식은 1948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허허벌판이야. 황무지에 들어가서 다 만드는 거야. 아무것도 없거든. 황무지에 나라를 만드는 거야.”
1948년 5월10일 한반도 최초의 보통선거가 치러졌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 948명 후보자가 입후보했다. 제주 4·3 영향으로 무효 선언된 북제주군 2개 선거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의원이 선출됐다. 김인식의 회고대로 그곳은 황무지였다. 헌법도, 정부도, 군대도, 대통령도 없었다. 같은 달 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2년 임기 동안 국가를 건설하고 의회정치를 시작했다. 정치학자 강원택은 제헌국회 의원들을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고 부른다.
제헌국회의 주요 기능은 물론 헌법 제정이었고 이 과정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다. 강원택은 헌법 제정 외에도 신생국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작동하기 위해 제헌국회가 했던 일들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국회 회의록이나 회고록을 꼼꼼히 살피고, 경향신문·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의 당시 보도도 주요하게 참고했다. 70여년 전 정치인들의 논의 수준은 놀랍도록 깊이 있고 또 치열했다. 오히려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의회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국호 결정 과정이 한 예다. 21세기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아무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제헌국회 의원들은 신생국 국호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표현된 유진오의 헌법 초안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 국호는 ‘조선’이었다. 그러나 망한 왕조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는 데 대한 거부감도 상당했다. 전 세계에 알려진 국호가 ‘Korea’라는 점에서 ‘고려공화국’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대한민국’에 대한 반대는 ‘대’라는 글자에 집중됐다. “큰 대 자를 넣은 것은 봉건적 자존비타심의 발성”(조봉암), “대 자는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스스로 존대하는 것”(조헌영)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국호는 표결 끝에 대한민국으로 정해졌다.
정부조직을 어떻게 꾸릴지를 두고 벌인 논의도 흥미롭다. 가장 큰 쟁점은 “경찰을 한 부로서 독립시키느냐 또는 내무부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문제”(경향신문 1948년 7월10일자)였다. 독립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직 군대가 없는 불안정한 안보 상황을 감안할 때 치안 강화를 위해 치안부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대 견해는 더욱 강력했다. “치안부를 독립시키자고 하는 것은 경찰국가를 맨든다는 것”(김광준), “우리나라는 일제하에서 경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을 했고 (…) 나라의 힘은 국민이 뭉치는 데 있읍니다. 그런데 경찰국가의 몽둥이로 국민을 다스려서야 되겠습니까”(윤길중) 같은 반대 의견이 나왔다. 투표 결과 치안부는 내무부에 부속됐고, 오늘날에도 경찰은 행정안전부 소속이다.
제헌국회가 북한이라는 ‘독재주의 공산국가’에 반대하는 보수 및 중도 인사 다수로 구성됐음에도 ‘사회민주주의’에 열려 있었다는 점은 놀랍다. 전진한은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봤다. 노동자·자본가·기업가가 합의해 산업을 부흥하는 방식이라는 이유에서다. 동아일보 여론조사(1946년 8월13일자)를 보면 여론도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순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진오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 체제에 편향함을 회피하고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의 원리를 아울러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노동자의 기업 경영 참가를 주장하는 의견은 소수였지만, 회사가 이익을 노동자와 나눠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다수가 동의했다.
흔히 사용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을 두고도 진보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유진오의 헌법 초안에는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發)한다”고 돼 있었으나 추후 ‘인민’이 ‘국민’으로 바뀌었다. 공산당이 선점한 ‘인민’은 쓰기 꺼림칙한 단어가 됐기 때문이다. 이에 다시 ‘국민’을 ‘인민’으로 바꾸자는 수정안이 제출됐다. 국민은 외국인을 포함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진오는 훗날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라고 회고했다.
국회와 대통령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국회 2년간 14번 거부권을 행사했고, 국회는 그중 12번을 재의결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서로를 충실히 견제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국회 연설을 25회 했고, 그중 19회가 제헌국회 때였다. 후임 대통령 중 국회를 가장 많이 찾은 이는 박정희 대통령(8회), 문재인 대통령(7회) 순이었다. 이는 제헌국회 당시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가 강압적이기보다는 협조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강원택은 “해방 이후의 정치는 사실 제도 밖에서 이뤄진 형태였다. 그러나 제헌국회라는 제도적 공간이 생겨나면서 초보적이고 느슨한 형태라고 해도 정당정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헌법, 국가의 기본이 되는 각종 법률, 그리고 이 시기의 정당정치 모두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제헌국회 때부터 ‘조항과 자구의 정리’를 하는 법제사법위원회가 인기 있었다는 사실, 20인 이상으로 구성되는 교섭단체에 대한 찬반양론은 오늘날 정치에 관심 많은 독자가 재미있게 읽을 법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국가의 앞날을 두고 제헌국회 의원들이 벌인 논쟁이 진영논리에 근거하지도 상대를 악마화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보수와 진보 어느 쪽이든 논리적이고 품위를 지켰다는 사실이 경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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